흡혈박쥐의 헌혈
흡혈박쥐의 헌혈
  •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 승인 2012.01.10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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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쥐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서울대 입구 봉천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차 안에 있노라면 심심찮게 목격하는 장면이 있다. 길 건너 지하철 입구에서 건장한 여인 두어 명이 지나가는 행인의 팔을 낚아채어 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큰 버스로 밀어붙이는 모습이다. 환한 대낮에 남의 귀한 피를 강제로 갈취라도 하겠다는 듯 밀어붙이는 여인을 피해 행인은 뺏기지 않겠노라 발버둥을 치며 빠져 달아난다. 매일같이 그곳을 바라보지만 적십자버스를 발견하고 제 발로 걸어가 헌혈하는 사람을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헌혈로 그만큼 줄어든 피는 다시 생성되며 건강에도 오히려 좋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헌혈을 꺼리는 것일까. 체중 미달로 헌혈 자격이 없는 바싹 마른 사람들이 “남을 위해 피를 줄 수만 있으면 나는 매일 한 번씩 뽑겠다”며 ‘안전함’을 과시하는 것말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면 무릅쓰고 줄행랑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부대나 학교 같은 곳에서 거의 강제로 피를 뽑지 않으면 충분한 혈액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한다.

자연계에서 헌혈의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동물은 놀랍게도 그 끔찍한 흡혈박쥐들이다.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밤마다 남의 목을 물어 피를 빨아먹는 바로 그 동물 말이다.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의 박쥐들이 과일이나 곤충을 먹고 사는 반면, 흡혈박쥐들은 실제로 열대지방에 사는 큰 짐승들의 피를 주식으로 하여 살아간다.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목 정맥을 뚫어 철철 쏟아져나오는 피를 들이마시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잠을 자고 있는 동물의 목 부위를 발톱으로 긁어 상처를 낸 후 그곳에서 스며 나오는 피를 혀로 핥아먹는 정도이다.

박쥐는 신진대사가 유난히 활발한 동물이다. 그래서 박쥐는 다룰 줄 아는 사람만이 다뤄야 한다. 너무 오래 손에 쥐고 있으면 에너지 소모가 심하여 까딱하면 죽는다. 흡혈박쥐도 예외가 아니라서 하루 이틀 피 식사를 하지 못하면 기진맥진하여 죽고 만다. 밤이면 밤마다 피를 빨 수 있는 큰 동물들이 언제나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지라 상당수의 박쥐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귀가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 흡혈박쥐 사회에서는 피를 배불리 먹고 돌아온 박쥐들이 배고픈 동료들에게 피를 나눠주는 헌혈 풍습이 생겼다.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서로 피를 게워내고 받아먹는 흡혈박쥐의 행동을 관찰하며 광견병 바이러스가 들끓는 피 세례를 얼굴 가득 받곤 했던 어느 동물행동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흡혈박쥐들은 대체로 자기 가족이나 친척끼리 피를 주고받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꼭 친척이 아니더라도 가까이 매달려 있는 이웃들에게 종종 피를 나눠주기도 한다. 이렇게 피를 받아 먹은 박쥐는 그 고마움을 기억하고 훗날 은혜를 갚을 줄 알기 때문에 이 진기한 풍습이 유지되는 것이다.

박쥐만큼 우리 인간으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동물도 없을 것이다. 물론 초창기 동물분류학자들도 박쥐를 새로 분류해야 할지 아니면 젖먹이동물로 분류해야 할지 적이 고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솝은 한술 더 떠 날짐승과 길짐승 편을 오가며 자기 잇속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자로 박쥐를 표현했다. 우리 옛 속담에도 “박쥐는 두 가지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고 했다.

박쥐는 엄연히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는 젖먹이동물이다. 젖먹이동물은 거의 전부 네 발로 긴다 하여 길짐승이라 하고 새들은 거의 모두 하늘을 난다 하여 날짐승이라 했지만 비행의 유연성과 테크닉으로 말하면 사실 박쥐를 따를 새가 없다. 박쥐들이 캄캄한 밤에 온갖 장애물을 피하거나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도망가는 나방을 낚아채는 모습은 한마디로 예술이다.

나는 열대에 사는 과일박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는 장대비를 피하기 위해 큰 나뭇잎들을 변형하여 이른바 텐트를 만드는 행동을 15년 이상 연구해왔다. 적당한 나뭇잎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이파리의 모양을 어떻게 변형시켜 원하는 텐트를 만드는가에 이르기까지 박쥐들의 기발한 행동들은 경이롭기만 하다. 그런 박쥐들 중 솔직히 말해 가장 징그러운 종류인 흡혈박쥐, 그들이 바로 자연계 제일의 헌혈자들인 것이다.

헌혈이 우리 인간이 행하는 다른 어떤 자선 행위보다 특별히 어려운 까닭이 단순히 주사바늘에 대한 공포심만은 아닐 것이다. 내 몸의 일부인 피가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도 모른 채 선뜻 내놓기란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대학시절 위독하신 친구 어머니를 위해 단숨에 두 병의 피를 뽑곤 며칠 앓아 누웠던 일 외에는 길에서 자진하여 헌혈을 해본 경험은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그 체중 미달을 빙자하여 남에게만 헌혈을 강요하는 비겁한 인물이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헌혈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이 피를 내줄 만큼 헌신적인 사람임을 남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단 헌혈이 그런대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모두가 팔뚝을 걷는데 나만 뒤로 숨기는 어렵다. 사회는 언제나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헌신적인 사람들을 선호한다. 그래서 우리는 은근히 자기가 헌혈을 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다그치면 헌혈 좀 하느라 늦었다고 자랑스레 떠들어댄다. 나는 가끔 헌혈을 했다는 표식으로 가슴에 달 수 있는 메달이나 자동차에 붙이는 스티커를 나눠주면 훨씬 더 많은 피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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