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고기 아빠의 사랑
가시고기 아빠의 사랑
  •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 승인 2012.04.0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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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아비의 지극 정성 자식 키우기

 
소설 ‘가시고기’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었다. 이 사실은 동물행동학자인 나에게는 색다른 감흥을 준다. 동물행동학이 자연과학의 한 분야로 입문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동물이 바로 가시고기이기 때문이다.

현대 동물행동학은 20세기 중반 무렵 유럽에서 행태학(ethology)이라는 학문으로 출발했다. 그 행태학의 기초를 다듬었고 나처럼 야외생물학을 하는 사람들로는 유일하게 노벨 생리 및 의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세 학자 가운데 한 분인 니코 틴버겐이 오랫동안 연구한 물고기가 바로 가시고기다.

가시고기 수컷들은 마치 일없이 여럿이 떼를 지어 거리를 배회하는 우리 사회의 젊은 남정네들처럼 겨우내 자기들끼리만 무리를 지어 몰려다닌다. 그러다 봄이 되어 하루해가 길어지고 몸 속에 호르몬이 솟구치면 눈 가장자리가 푸르둥둥해지며 아랫배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죽고 못살던 친구가 갑자기 버거워지며 수컷들은 비로소 제가끔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 다투기 시작한다. 어제의 벗이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일단 자기 터를 확보한 수컷들은 물 속에 있는 작은 나뭇가지나 수초들을 모아 좁은 터널 모양의 둥지를 만든다. 그리곤 특유의 지그재그 스타일의 춤을 추며 암컷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틴버겐은 몇 가지 실험을 통해 가시고기 암컷들은 수컷의 붉은 배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수컷의 현란한 춤 솜씨도 한몫을 하지만. 불룩하게 튀어나온 붉은 배를 출렁이며 온갖 아양을 떠는 수컷이 마음에 들면 암컷은 그 수컷을 따라 그가 만들어놓은 사랑의 터널을 찾는다. 뾰족한 주둥이로 연신 터널의 입구를 가리키는 수컷의 정성에 암컷은 터널 속으로 몸을 들이밀고 이내 알을 쏟는다. 옛말에 뒷간에 들 때와 날 때가 다르다더니 암컷이 알을 낳기가 무섭게 수컷은 언제 보았더냐 싶게 매정할 정도로 암컷을 쫓아내곤 그 위에 정액을 뿌린다. 그리곤 또 다른 암컷을 찾아나선다. 이렇게 여러 부인을 차례로 맞아들여 충분히 알들이 쌓이면 그때부터 혼자서 자식을 키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슨 청승일까 싶지만 그 많은 배다른 자식들을 가시고기 아빠는 정말 정성스레 돌본다. 행여 산소가 모자랄세라 터널 입구에서 줄기차게 지느러미를 퍼덕인다.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의 눈을 늦추지 않는다. 물고기 알은 물 속에 사는 동물들의 별식이다. 자기도 알을 낳아 뿌렸으면서 곧장 남의 알을 집어먹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물고기 세계에서는 엄마들은 죄다 떠나고 아빠들이 집을 지킨다. 자연계를 통틀어 볼 때 홀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는 경우는 흔해도 홀아비 혼자 자식을 돌보는 예는 드문 법인데 유독 물고기 세계에서는 자주 부성애가 모성애를 능가한다.

나는 동물행동학을 미국에 유학한 이후에 배우기 시작하여,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직도 국내에 사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 그런 나에게 가시고기는 또 하나의 짜릿한 감흥을 던져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사는 물고기인 줄 모르고 공부했던 가시고기가 동해로 흘러드는 영동지방의 하천들에 심심찮게 서식한다는 걸 알아내곤 뛸 듯이 기뻤다. 더욱이 지금은 강릉 비행장에 갇혀버린 내 고향집 앞 들녘에 흐르던 개울에 특히 많이 산다는 얘기를 듣곤 잠시나마 유치한 운명론자가 되기도 했다. 어려서 삼촌과 같이 소를 먹이다 풍덩 뛰어들던 그 개울에 내가 저 먼 이국 땅까지 가서 평생의 업으로 선택한 학문의 뿌리가 숨쉬고 있었다니.

요즘 우리 사회에는 가정을 버리는 여인들이 늘고 있다. IMF는 아빠들만 서울역 지하도로 내몬 것이 아니다. 젖먹이동물의 어미로서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젖먹이동물의 암컷들은 물고기나 새들처럼 알을 몸 밖에 내놓고 품는 것조차 안심이 되지 않아 아예 몸 속에 품기로 작정한 동물들이다. 아무리 뻔뻔한 남편이라도 아홉 달씩이나 무거운 몸을 가누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보며 미안한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이가 없을 줄 안다. 나도 아내가 아들 녀석을 임신하고 있었을 때 차라리 내 뱃속에 좀 넣어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마음이고 바로 이 암컷들의 끔찍한 자식 사랑이 젖먹이동물 수컷들을 해방시켜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젖먹이동물의 경우 할 일 없는 수컷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집을 빠져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암컷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떠나버리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기계문명사회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인류 종족 전부를 놓고 볼 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일부다처제를 따르는 전형적인 젖먹이동물의 일종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자기 자식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떠나버리는 식으로 진화한 것은 아닌 듯싶다. 물론 어머니의 사랑에 비하랴마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아버지들은 여느 젖먹이동물의 수컷들과는 다르다. 자식의 주검 앞에서 통곡하던 어머니가 눈물도 보이지 않는 남편을 나무라자 어렵게 연 아버지의 입에선 피눈물이 흐르더라는 옛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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