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들의 '삼국지'
개미들의 '삼국지'
  •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 승인 2012.05.2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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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개미들의 동맹맺기

 
나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지 않는다. 책 읽는 속도가 유난히 느리고 한 번 읽을 때 매우 꼼꼼히 읽는 편이라 같은 책을 두세 번 읽을 만큼 호흡이 길지 못하다. 나는 어쩌다 눈으로 책읽기를 배우지 못했다. 큰 소리를 내건 아니건 간에 꼭 입으로 읽어야 하니 느릴 수밖에. 대사가 많이 나오는 책을 읽으려면 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모든 배역들의 대사를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읽는다. 그래서 희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본 기억이 없다. 연출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유일하게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은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삼국지’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읽기 시작하여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잡아 열 번은 읽었으리라. 만화로도 두어 번은 읽었다. 그런데 ‘삼국지’가 과연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냐를 놓고 심심찮게 논란이 인다. 신의와 명분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야심가들을 영웅으로 미화하고 상대를 속여 궁지에 몰아넣는 용병술을 가르치는 책을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권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와 ‘삼국지’의 진짜 교훈은 정의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진 충신열사들의 무용담 속에 숨어 있다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사실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망측한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한번쯤 ‘삼국지’에 그려진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세태를 연상하게 된다. 어제의 적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 이불 속에서 뒹굴기를 밥 먹듯 하며 전 국민을 상대로 공언한 맹세를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순식간에 뒤집는 우리네 정치인들. 연인이나 친구에게는 불륜과 배반의 흔적만 보여도 가차없이 절교를 선언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져야 할 정치 지도자들의 부도덕에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깨끗한’ 한 표를 건네는 우리 유권자들. 이 엄청난 모순 앞에서 나는 종종 동물들의 사회를 떠올린다.

중남미의 열대림에는 대나무처럼 속이 텅 빈 트럼핏나무 속에 아즈텍이라 불리는 개미들이 산다. 다 성장한 나무 속에는 어김없이 한 여왕이 통치하는 하나의 개미왕국이 자리잡고 있지만 어린 나무 속에는 장차 그 나무를 차지하려는 여러 여왕개미들이 제가끔 자기만의 국가를 건설하느라 여념이 없다. 내가 코스타리카의 몬테베르데라는 고산지대에서 아즈텍 여왕개미들이 펼치는 개미제국의 역사를 한 편의 대서사시로 쓰기 시작한 지도 어언 20년이 다 되어간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동료 생물학자 댄 펄만 박사와 함께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개미 제국에서 승자로 떠오르는 유일한 길은 주변 국가들보다 하루라도 먼저 막강한 군대를 키워내는 것이다. 개미왕국의 군사력이란 한마디로 일개미의 수를 의미하는데, 여왕개미 혼자서 키워낼 수 있는 일개미의 수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왕개미들이 여럿 모이면 모일수록 한꺼번에 그만큼 많은 일개미를 길러낼 수 있다.

그래서 아즈텍 여왕개미들은 다른 여왕들과 한 살림을 차려 같은 시간 내에 몇 배의 일개미들을 길러내는 전략으로 천하를 평정한다. 오나라가 그랬고 촉나라가 그랬듯이 전략상 다른 여왕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아즈텍 여왕개미들이 같은 종의 여왕들은 물론 다른 종의 여왕개미들과도 서슴없이 협동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종의 개미들이 협동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종족끼리 동맹을 맺는 정도가 아니다. 비유를 하자면 인간이 오랑우탄을 꺾기 위해 침팬지와 한 살림을 차리는 격이다. 이념이 다른 정치인들이 오로지 정권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합종연횡을 밥먹듯 하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을 보고 우리네 정치 성향이 개미사회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개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진화의 역사를 걸어온 곤충의 일종이다. 그들의 사회는 조지 오웰이 묘사한 것처럼 개인의 존엄성보다는 집단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사회다. 여왕개미가 내뿜는 강력한 화학물질에 세뇌된 수천 수만의 일개미들이 엄청난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유지되는 일종의 전체주의 사회인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합리적인 면만 생각한다면 인간의 민주주의체제보다 개미의 제도가 더 훌륭하게 느껴진다. 소속 정당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다 돼버리는 우리의 제도에 비하면 천하가 평정된 다음에야 누가 진정한 여왕으로 등극할지를 결정하는 개미들의 지혜가 훨씬 앞선 듯 보인다. 하지만 진화란 언제나 좀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더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특별히 도덕적인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어느 동물들보다 유난히 도덕을 운운하며 사는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이 이처럼 ‘도덕적인 동물’로 진화하게 된 이유는 도덕과 윤리 기준에 맞게 행동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득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간의 약속 이행에 의견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이란 걸 만들었고 변호사라는 직업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법을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만들어도 사회 구성원들의 도덕성이 기본이 되지 않는 한 올바른 사회질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선(善)과 악(惡)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고 한 공자님 말씀을 늘 선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간혹 벌어지는 악도 선한 눈으로 바라보면 배울 것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악행이 선행보다 더 만연되어 있고 악을 행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별 문제없이 칭송받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악에서 선을 끌어내라는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사실 조금은 걱정스럽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삼국지’를 읽으며 마키아벨리식 권모술수를 자칫 삶의 지혜로 배울까 염려하는 이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도 청소년들이 방학 중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어느 신문사의 요청에 건네준 내 도서목록에는 어김없이 ‘삼국지’가 들어 있었다. 언젠가 소설가 이문열 님이 지적한 “직접적인 징벌의 형태로든 간접적인 비난의 형태로든 대가 없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삼국지’의 참교훈이 우리 아이들의 가슴속에 남을 것을 기대하며, 다른 많은 동물들과는 달리 도덕적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묘한 동물에 또 한 번 실낱 같은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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